Essay | 식물의 기쁨과 슬픔

멀쩡하게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찾아온 어두운 생각에 굴복하고 마는 날들이 있다. 일정한 주기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그런 날이면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가장 나약한 부분을 골라 가차 없이 공격하곤 한다. 그렇게 나는 종종 나에게 아주 못된 인간이 된다. 생각해보면 감정 기복이 심하고 쉽게 어두워지는 성격을 타고나기도 한 것 같다. 언젠가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엄마에게 “이랑이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하고 묻던 날 엄마는 잠깐 고민하다가 “감정 기복이 심한 아이였지”라고 대답했다. 엄마의 대답에 나는 조금 쑥스러웠고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기 더 까다로운 상태로 태어나기도 한다. 혹은 마음을 다스리기 불리한 상태로 자라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로 곤란하다. 스스로를 다스리기 어려운 날들이 이어지면서 나는 작은 자극에도 쉽게 지쳤고 평안한 일상을 염원하게 되었다. 본가를 박차고 나와 학교 앞 작은 원룸에 살던 시절부터 항상 식물을 좋아했다. 언제나 쉽게 사들였고, 조금 시들해지면 정성을 다한답시고 물을 콸콸 부어 땡볕에 내놓곤 했다. 일주일에 두 번 물을 주면 알아서 잘 자란다던 식물들이 내 집에 들어오면 영락없이 픽픽 쓰러져 죽었다. 개중엔 조금 더 튼튼하고 오래 버티는 식물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기로 버티던 식물마저 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뿌리에 물을 가득 머금은 채 수많은 해충의 타깃이 되거나 버티기를 포기하고 죽어버렸다. 그저 ‘당연히’ 잘 자라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여기고 무모하게 식물과의 동거를 이어갔다. 아무리 멋모르는 상태로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 3,000~5,000원이면 새로운 생명을 내 집에 들일 수 있었기에 작은 소비에서 비롯된 만족감을 좋아하기도 했다. 내 품에 들어온 식물들은 죽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했다. ‘이번에는 잘 키울 수 있을 거야’라는, 엔도르핀이 뿜어내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데려온 식물을 죽일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자학하기도 했다. 그렇게 식물과의 일방적인 관계가 이어지던 어느 날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일에 치이고, 거기에 세상에 대한 미움까지 버무려져 꼼짝없이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일도 싫고 사람도 싫었지만 신기하게도 식물만은 여전히 좋았다. 종종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라는 문장을 마주하곤 한다. 누군가의 곁에서 기쁨과 슬픔을 모두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소중한 마음의 위안이 되어준다. 그렇지만 말로 꺼내기 수줍을 정도로 작은 기쁨과 감추고 싶은 슬픔의 시간 속에서 항상 내 곁에 있어준 건 식물이었다. 식물 그 자체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키우는 데는 별 욕심이 없던 나에게도 식물은 늘 자애로웠다. 아직 식물과의 인연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지 방법이 틀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시든 이파리를 때맞춰 정리해준 적도 없고, 식물의 이름을 제대로 알아보고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적도 없다. 그렇게 무신경한 주인으로 살던 날들을 청산하기로 결심하고 식물에 대한 마음의 각도를 틀어 다시 바라보았다. 그 시절 내가 식물을 기르며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바로 물이었다. 빛과 통풍이 풍부한 화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물을 주는 것과 온종일 문을 꽁꽁 닫아둔 어두운 집에서 일주일에 두 번 물을 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동안 물이 너무 많아 천천히 익사하고만 식물들에 대한 미안함을 느꼈다. 초보 가드너들이 식물을 죽이는 가장 흔한 이유가 과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물 주기에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다음 실수는 내가 원하는 곳에 식물을 두고 키운 이기심이었다. 허구한 날 암막 커튼을 치고 잠들어 오후에야 슬그머니 깨어나는 나의 침실에서 살아남는 식물들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내가 밝다고 느끼는 거실에서조차 잘 자라지 못하는 식물들이 있었다. 식물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내 기준보다 훨씬 밝은 빛과 풍부한 통풍이 필요했다. 하루 종일 해와 바람을 충분히 받으며 자라야 할 율마를 작업실 책상 옆에 두고 키우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저 그 연녹색의 싱그러움을 곁에 두고 싶은 욕심에 작업을 하다가도 한 번씩 율마와 눈을 마주치고 기뻐하곤 했지만, 철없는 주인을 지켜보는 율마의 사정은 좀 달랐다. 내게 충분한 빛이라고 해서 율마가 살기에 충분한 빛은 아니었던 것이다. 들판에서 마음껏 뿌리를 내리며 자라기 좋아하는 율마는 해와 바람이 부족해져 내 집에 온 지 고작 2주 만에 죽어버렸다. 답답한 복도 끝에 세워둔 선인장도 같은 이유로 죽었다. 지구 반대편의 건조하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태어난 선인장은 내 이기심으로 침실 앞 복도의 눅눅하고 어두운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단단하던 몸통이 물렁하게 변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죽어버렸다. 선인장의 죽음 이후로 나는 선인장 키우기가 쉽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사기꾼처럼 느꼈다.‘어차피 나는 선인장도 자꾸 죽이는걸.’그 어느 때보다 슬럼프가 짙고 무겁던 봄, 조금 달라진 마음의 각도로 식물들 곁에 살기 시작했다. 인도고무나무는 이미 엉망진창인 돌봄에 의해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그나마 남은 이파리 몇 장도 상처투성이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열심히 검색해보고 가드닝 서적을 뒤적여가며 식물의 삶과 죽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성한 이파리를 다 잃고 회초리 같은 줄기 끝에 작은 이파리 두어 개가 남은 인도고무나무 곁에 앉아 초록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나무에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과 그동안 다른 식물에 저지른 모든 과오를 마주하게 되었다. 당장 인도고무나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영양제를 꽂아주거나 물을 더 준다고 해서 나무가 다시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나무가 열심히 숨 쉬고 무사히 다음 이파리를 낼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둬야 했다. 어둑한 거실 구석에서 조금 더 밝은 창가로 나무를 옮기고 온종일 나무에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이파리 주변의 공기를 순환시킴으로써 나무가 살아가기 더 편한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변화하는 것은 없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무에 쏟은 나의 하루짜리 정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정성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지나면서 나무는 다시 힘을 낼 에너지가 모였다는 듯 새순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무를 돌보며 내 곁에 식물이 하나둘 늘어났다. 식물에 대해 공부할수록, 더 자세히 바라볼수록 식물에 대한 나의 마음은 점점 더 진지해졌다. 각 식물의 성장 방식이나 번식 방법과 특성을 알아가는 것은 경이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분을 안겨줬다. 그렇게 각기 다른 대륙이 고향인 식물들이 나와 아침 시간을 함께하기 시작했다.프리랜서인 나의 일상은 직장인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달력에 적힌 마감 일정과 해야 할 일들이 스케줄에 굵은 윤곽을 잡아주긴 하지만 기상, 출근, 취침 같은 루틴은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출근이나 점심 같은 자잘한 강제성 없이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큰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보통 마음 건강이 단단한 시기에 주어지는 이러한 자유는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그렇지 못한 시기에는 차라리 어떤 강제성이라도 있어 내가 나를 망치는 가능성을 줄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십수 년간 반복되어온 고질적 악순환은 식물들이 곁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희석되었다. 내 곁에 건강한 세계를 두고 있자니 나의 마음도 함께 건강해진다. 일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온 집 안 식물을 돌보는 일이다. 거실, 옷방, 테라스에 소복하게 놓인 식물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지난밤에는 별일 없었는지, 어떤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지 인사하고 식물 각자에게 필요한 돌봄을 제공하는 것은 내가 ‘루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절대 불변의 행동이다. 그 루틴 덕택에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던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식물이란 당연히 자라나는 존재가 아니라 자라나도록 곁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줘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크고 작은 과정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곁을 지키느냐에 따라 식물의 내일이, 식물의 다음 계절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내가 그려둔 청사진에 맞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을 보자니 거대한 성취감이 밀려왔다.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그 건강한 성취감에 취해 나는 어두운 마음을 조금씩 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따라오던 어둠이 두렵다. 불안과 무기력을 껴안은 채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두르고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다. 그 어두움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나를 지킬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나에겐 그 무기가 바로 식물 곁에서 조용히 부유하는 시간이다. 어째서 하필 식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엉망진창인 가드너로 살다가 식물을 진심으로 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다가 내 손을 잡아준 존재가 식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나를 나아지게 하는 것은 항상 내 곁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준 나의 반려식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무기가 반려동물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의 사랑이나 연인의 뜨거운 마음일 수도 있다. 혹은 서핑이나 커피일 수도 있겠다. 그게 어떤 종류든, 종종 마음에 어둠이 내려앉아 일상을 지탱하기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지킬 무기를 단단히 지니고 있었으면 좋겠다. Writer 임이랑, 밴드 ‘디어클라우드’에서 노래를 짓고 연주를 한다. 사람보다 동물과 식물을 더 좋아한다.

Mindgraph magazine 마인드그라프 매거진

logo
LOG IN 로그인
  • HOME
    • ARCHIVE
      • COUNSELING
        • COMMUNUTY
          • 마이리추얼
          • 체크리스트
          • notice
          • Q & A
        • SHOP
          • APP
            • ABOUT

              Mindgraph magazine 마인드그라프 매거진

              logo
              • HOME
                • ARCHIVE
                  • COUNSELING
                    • COMMUNUTY
                      • 마이리추얼
                      • 체크리스트
                      • notice
                      • Q & A
                    • SHOP
                      • APP
                        • ABOUT
                          Search 검색
                          Log In 로그인
                          Cart 장바구니

                          Mindgraph magazine 마인드그라프 매거진

                          logo

                          Mindgraph magazine 마인드그라프 매거진

                          logo
                          • HOME
                            • ARCHIVE
                              • COUNSELING
                                • COMMUNUTY
                                  • 마이리추얼
                                  • 체크리스트
                                  • notice
                                  • Q & A
                                • SHOP
                                  • APP
                                    • ABOUT
                                      Search 검색
                                      Log In 로그인
                                      Cart 장바구니

                                      Mindgraph magazine 마인드그라프 매거진

                                      logo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구글 플러스
                                      Terms of Use
                                      Privacy Policy
                                      Confirm Entrepreneur Information

                                      Company Name: 마인드그라프 | Owner: 이누리 | Personal Info Manager: 노주선 | Phone Number: 02.6949.4774 | Email: mindgraphlove@gmail.com

                                      Address: 서울시 서초구 양재천로 95-4 세원빌딩 2F | Business Registration Number: 284-87-02136 | Business License: 제2021-서초-3634호 | Hosting by sixshop

                                      floating-button-img